정의연, 집단이익보다는 조직목표에 충실한 목민관 정신 본받아야
정의연, 집단이익보다는 조직목표에 충실한 목민관 정신 본받아야
  • 이대원 기자
  • 승인 2020.05.16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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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 이익보다는 자기가 불지옥에 빠진 것처럼 여겨라”

 

이대원 기자
이대원 기자

 

 

연이은 불지옥 참사의 아픔은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지난 안동과 강원 고성산불, 이천화재참사의 불지옥 악몽은 피해를 본 사람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혔다. 당시의 아픈 기억이 오랜 시간 지속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불지옥 이슈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한 단체가 불지옥에 빠진 일이 발생했다. 지난 7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이하 정의연)의 기부금 투명성 요구와 함께 수요 집회에 더 이상 이용당할 수 없다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말이 전국을 강타하며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 대다수 국민들은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고는 있지만 이런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흔히 현대 사회는 조직화되어 있다고 한다. 정의연도 조직목표가 있을 것이고 지향하는 목표를 성취해 가면서 좋은 평가를 받지만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거나 자신의 생명처럼 하나 된 마음가짐이 없다면 향후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국비지원·공공모금하는 정의연, 조직목표에 충실한 목민관정신 가져야

연간 수억의 정부예산을 지원받고 수억의 공공모금에다 수십억 위안부배상금을 돌려주지 않고 보관하면서 회계처리를 거의 안 한 정의연을 보면서 민간단체의 도덕성도 정부관료 못지 않게 투명성면에서 높아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정의연이 추구한 가치 과정은 어쩌면 소라우프(Sorauf, 1957)의 말에 잘 비유될 수 있다.

“집단이익에 초점을 두면 공동선(collective good)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집단과정(group process)의 산물로 보는 견해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정치적이고 과정적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공동선이 실현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놀랍고도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적 다윈주의(political Darwinism)*를 낳은 형태이다.”

이는 지난날 정의연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케어한다는 공동선보다는 집단이익에 초점을 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말이다.

“백성을 내가족보다 사랑하는 목민관(牧民官)이 있어야 한다.”

목민관은 백성을 다스려 기르는 벼슬아치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군현에 파견한 지방 관리인 수령 [守令]이나 사또(원님)라고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목민관보다 높은 벼슬을 하면서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던 위인도 있지만 현감, 수령, 사또(원님)라면서 명성이 높았던 위인은 사실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 만큼 백성들과 가까이 현장에서 지내면서 선정을 베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홍조 선생의 목민관 정신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회인 현감(行懷仁縣監)을 지냈다.

이홍조 선생은 계미년(1643)에 회인 현감(懷仁縣監)으로 나아갔다. 그 때 정사를 청렴하고 곧으며 관대하게 하여 숙폐(宿弊)를 제거하고 사사로이 통하는 길을 막고,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을 간략하게 하고 옥의 송사를 공평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아전과 백성들이 칭송하고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현감이 된 지 3년에 부인의 상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행장(行裝)이 아무것도 없고 전대에는 가는 동안의 식량이 몇 말뿐이었다고 한다.

청렴하고 삼가서 직분을 잘 수행하였고, 권세와 이권과 분잡하고 화려한 것에 대해서는 담박하게 돌아보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현영(顯英)과 재종제(再從弟) 기조(基祚)가 잇따라 이조의 판서와 참판이 되었으나 천거해 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집이 가난하여 쌀독에 쌀이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하였다고 하며, 세상을 떠났을 때 내제(內弟)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가 제문(祭文)을 짓기를, “시속에 초절(超絶)한 지조와 빼앗을 수 없는 뜻은 애당초 애써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절로 남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였다.

사실 이홍조 선생의 당시 행적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강하다.

우리나라는 항상 선거를 통해 목민관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마다 배신감을 느낀 경우가 있고,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최근 연이은 불지옥 사태로 재산을 잃고, 정의연의 회계투명성과 수요 집회 논쟁으로 가슴 아파하는 이슈가 천재(天災)에는 목민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인재(人災)였다면 목민관은 순국열사처럼 자기를 바쳐 백성을 지키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감 있는 자세와 진실 규명 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작금의 정의연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눈을 두려워하라!

 

▶역주

*정치적 다윈주의(political Darwinism)란 정치권력이 소수의 지배집단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널리 분산되어 있으며, 다양한 이익집단이나 일반대중의 의사가 반영되어 정책이 결정되고 사회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이론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 임진왜란 명재상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손주이다.

                                                                                       이대원기자 htomm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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