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삭기 속에 사라져간 꽃무릇 생각나
굴삭기 속에 사라져간 꽃무릇 생각나
  • 꽃소리
  • 승인 2020.02.0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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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무 릇

 

                                                                                                       꽃소리(정원디자이너)*

 

사계절 내 꽃밭에 피고 지는 수많은 꽃들 예쁘기 그지없다. 그러나 예쁘다는 공통점에서 좀 더 갈래를 지어 꽃들이 뿜어내는 그 정취를 표현해보면 화려, 고고, 청초, 우아, 단아…. 모두 다르다. 특히 꽃밭에서 직접 길러보면 더욱 그러한데 아마 꽃들마다 다른 한 살이 모습도 한 몫 하리라. 그렇다면 꽃무릇엔 어떤 수식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 제법 굵직한 진초록 곧은 줄기, 잎이 없어 더 도드라지는 그 줄기 위에 단정하게 올라앉은 고운 선홍빛 꽃송이들. 만발한 꽃무릇을 대할 때면, “아!” 발걸음 절로 멈춰지는데, 그 어여쁨의 감탄 뒤엔 왜 자꾸 ‘처연함’이 따라오는가?

 

 

 

꽃무릇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고 따로 피어 상사화 무리에 넣는데, 우리가 상사화라고 부르는 연보라 꽃과는 완전히 다른 꽃이다. 그런데 꽃의 한 살이를 보면 오히려 꽃무릇이 상사화의 그 안타까운 의미에 더 가깝다. 연보라 상사화는 봄에 잎을 내어 서너 달 싱싱히 꽃을 기다리지만 초여름이 시작되면 어느새 잎이 허물거리다 사라진다. 하지만 길어야 두어 달 후면 꽃대가 올라오는데, 그저 ‘에그,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꽃을 봤을 텐데.’ 뭐 그런 느낌. 그러나 꽃무릇은 초가을 어느 날 홀연히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질 때 쯤 서둘러 초록 잎들이 뾰족뾰족 올라오지만, 결코 둘은 만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 꽃무릇 초록 잎의 처절한(?) 기다림은 길러보지 않으면 모르리라.

 

 

 

꽃무릇의 개화 기간은 길어야 열흘 정도. 그 꽃을 보지 못한 잎들은 가을에 부지런히 잎을 키워 긴긴 겨울 얼어붙은 꽃밭에 바짝 누워 버틴다. 따뜻한 봄이 와, 수선화 튤립 여기저기 두런거릴 때 까지 기다리다 지쳐 끝내 잎들은 조금씩 말라 사라지는데 그 기다림의 기간이 7~8 개월은 족히 된다. 내가 너무 신파조로 꽃을 보나? 뭐 어쨌든 꽃무릇이야 말로 명실상부 상사화다.

 

꽃소리씨가 가꾸는 한겨울 정원풍경

겨울꽃밭에 초록잎새 띄우는 꽃무릇이 빨간꽃잎 못지않게  사랑스럽다

 

                               

초록색 꽃무릇이 활엽수아래 지천으로 널려 있는 한겨울  함양 상림공원 모습

 

어느 겨울 읍네 도로 확장공사로 보도 옆 꽃밭을 모두 갈아엎는다는데, 그 꽃밭엔 꽃무릇이 지천이고 그 꽃무릇 캐내도 된다는 정보가 들어 왔다. 당장 삽 들고 돌진! 꽃무릇의 양은 예상보다 엄청났다. 파보니 뿌리도 꽤 굵직했다. 산삼을 캔들 그리 흥분되었을까? 캐 온 꽃무릇 연 이틀 다리가 저리도록 심었는데도 밤에 누우면 두고 온 꽃무릇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 뒤 친구, 동생, 놀러 오는 사람마다 부추겨 꽃무릇을 캐 왔었다. 내 꽃밭엔 더 이상 심을 데가 없는데 그 꽃밭엔 캐 낸 것보다 더 많은 꽃무릇이 남아있었다.

두고 온 그 꽃무릇은 이후로도 불쑥 불쑥 떠오르다, 아예 마음 속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들어앉는 것 같았다. 왜일까? 그 꽃들이 버려짐에 대한 경제적 손실 때문? 아니,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 그 꽃밭에서 버려지는 꽃들이 어디 꽃무릇 뿐이었던가. 월동 중이던 수많은 꽃들이 있었건만 왜 꽃무릇만 그리 맘에 밟혔을까?

아마도 그건 초록 싱싱한 그 잎 때문이었으리라. 엄동설한 찬 서리 눈 속에서도 꿋꿋한 잎들은, 땅 속 깊은 구근이나 포근한 털옷의 꽃나무 겨울눈과는 차원이 다른 겨울나기다. 결코 만나지 못할 선홍 꽃잎을 위해 맨 잎사귀로 온 겨울에 맞서는 그 푸른 잎들, 조금이라도 더 지켜주고 싶었다. 굴삭기 굉음 속에 나딩굴기 전에(산청 별총총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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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환경신문 2020-02-06 11:32:17
꽃소리씨는 교육자이자 귀향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