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역사가 보이는 길, 부산형 도심보행길 14개 사업장 선정
부산의 역사가 보이는 길, 부산형 도심보행길 14개 사업장 선정
  • 글로벌환경신문
  • 승인 2019.04.10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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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는 올해 1월 보행혁신 종합계획 발표에 따른 부산형 도심보행길 조성을 위해 16개 구·군 대상 공모사업을 시행한다. 서면 근대산업 유산 탐방길 조성 등 최종 14개 사업장(100억원) 선정하고 4월부터 본격 착수한다. 지난 1월 민선 7기 2019년 1호 정책으로 발표한 ‘사람중심 보행도시’의 보행혁신정책이 속도를 높인다. 부산시(시장 오거돈)는 도심보행길 조성사업을 위해 16개 구·군을 대상으로 공모절차를 거쳐 100억원 규모의 최종 14개 사업장을 선정하였으며, 신속한 사업추진을 위해 시비 보조금 25억원을 먼저 교부한다.

이번 도심보행길 조성사업에는 국비 50억원, 시비 25억원, 구비 25억원 총 100억원의 사업비가 분야별로 투입된다. 세부적으로 ‘탁 트인 인도시설물 비우고 모으기 줄이기 사업’에 6개소 40억원, ‘부산형 테마거리 조성사업’에 4개소 40억원, ‘생활 속 걷기, 걷고싶은 동네한바퀴 사업’에 4개소 20억원이 투입된다.

이번 공모사업에 선정된 14개 사업은 오는 12월 개최 예정인 ‘부산의 길 콘테스트’에 참여해 사업의 기획, 설계, 홍보, 시공, 성과 등 전 과정에 대해 오디션 방식의 최종평가를 거친다. 길을 통한 지역 주민과의 커뮤니티 공간 역할 제공 등에 대한 성과평가를 통해 시상금을 지급하고 내년도 보행사업 선정 시 가점을 부여한다.

부산시 관계자는 “이번 사업을 통해 우수사례를 적극 발굴하여 보행문화를 확산하고 아름다운 부산의 길을 전국적으로 홍보할 것”이라면서, “우수사업장 조성에 기여한 지역주민, 단체 등에는 포상도 시행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라고 전했다.

 

2019년도 부산 도심보행길 조성사업(14개사업, 100억원)

 

제일 먼저, 서면 근대산업유산보행길은 과거 대한민국의 경제를 주름잡던 제일제당, 락희화학, 동명목재, 6대신발기업등 대기업의 태동지로 산업유산의 자취와 추억을 생각하며 그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며 도심속 문화예술적 정취를 누길수 있는 길이다. 더불어 하루 하루가 다르게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속에 과거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며 그 시절의 기업가의 뚝심의 기운을 얻어 서면에 가면 새로운 희망이 생기므로 꼭 한번은 둘러볼 필요가 있다. 철길마을 추억의 벽화, 제일제당, 동명목재, 락희화학, 서면극장가 등이 중심이다.

 

서면 근대산업유산보행길

 

2시간 코스, 8km(361kcal 소모)

황금신발길 A코스

황금신발조형물(옛진양고무) → 굴다리슈퍼 → 부산진구 상징탑 → 황령산 봉수대 모형 → 영광도서 → 부산탑 모형 → 스웨덴 참전비(롯데백화점) → 서면시장 → 거점시설(부산포민속박물관)

황금신발길 B코스

송상현광장 → 부산시민공원 → LG사이언스홀(옛 락희화학)

서면영화길 A코스

스웨덴 참전비(롯데백화점) → 서면시장 → 알리안츠생명발딩(옛동명목재터) → 더샵센트랄시티(옛 제일제당) → 서면특화거리(옛 서면극장가) → 전포카페거리 거점시설(빈티지38/애플빈/꽃피움) → NC백화점(옛 경남모직) → 전포한신아파트(옛 대양고무)/서면롯데캐슬아파트(옛 흥아타이어터)

서면영화길 B코스

거점시설(챔버스퀘어) → 알리안츠생명발딩(옛 동명목재) → 더샵센트랄시티(옛 제일제당) → 전포한신아파트(옛 대양고무)/서면롯데캐슬아파트(옛 흥아타이어터) → 거점시설(구무근추억창고/드림플러스아트)

 

추억길 안내판

경남모직 옛터

송경남모직 옛터 사진

서면 패션 리더들의 혼방 양복지가 태어난 곳,
K알고라텍스를 아실는지. 1960~7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고급 원단의 양장·양복지. 혼방(混紡)이라고 했다. 성질이 다른 섬유를 섞어 짜는 혼방은 당시로선 신기술이었다.서면의 패션 리더들은 보들보들한 감촉의 K알고라텍스로 옷을 해 입고 한껏 멋을 부렸다. 추억은 K알고라텍스를 낳은 경남모직의 부산 전포동 호시절을 기억한다. 1956년 설립된 경남모직은 전포동 668-1번지에 처음 둥지를 틀어 한일합섬 등 1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섬유 제국’인 한일그룹이 되었다. 신사 숙녀들은 기억할지어다. 전포동 이 자리에서 그대들 패션의 부푼 꿈들이 영글었음을.

경남모직 스토리
*소사: 경남모직은 김한수 씨가 1956년 미국의 원조 자금을 받아 부산진구 전포동에 설립한 회사다. 60년대 경제 부흥의 시대적 흐름을 타고 방적·염색·가공에 이르기까지 일괄 생산체제를 갖추면서 업계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 이때 출시한 K알고라텍스는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1967년 주력 계열사인 한일합섬을 마산으로 옮겼고, 박정희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사세는 더욱 확장됐다. 80년대 들어 기업 여건이 어려워져 1986년 전포동 공장 라인을 마산으로 옮기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1995년엔 공장 터까지 매각했다. 1997년 말에는 부도를 낸 뒤 법정관리를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6년 SM그룹의 계열사가 되었다.
*에피소드: 1970년대까지 경남모직은 제일모직과 함께 국내 모직업계의 쌍두마차였다. 섬유산업 등 경공업이 한국경제의 주축을 이루던 시절, “한일그룹(경남모직)에 다니는 미혼 남녀라면 최고의 신랑 신부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방적공장 취직은 배고픈 소녀들의 꿈이었다. 마산으로 본거지를 옮긴 경남모직(한일합섬)은 1974년 배움에 목마른 여공들을 위해 한일여실고를 설립했다. 국내 첫 산업체학교다. 개교식 땐 4000여 학생들이 각자 고향의 잔디를 옮겨 심어 ‘팔도잔디’ 운동장을 만들었다. 잔디는 푸른 꿈과 희망이었다. 한일여실고는 모기업이 어려워지면서 5만여 동문을 배출하고 2000년에 문을 닫았다.

 

옛 제일제당

옛 제일제당 사진

설탕의 원조, 한국 밥상의 역사가 머문 곳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여름. 서면 아래쪽 동천변이 떠들썩했다. 부산진구 전포동 743번지, 1천여 평의 부지에 공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장 이름은 제일제당. 그해 11월 5일 공장에서 순백색의 설탕이 생산됐다. 외국산 설탕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때 우리 기술로 국내 최초의 정제 설탕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호암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창업주. 국산화로 사업 물꼬를 튼 제일제당은 ‘백설표’란 브랜드를 앞세워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눈처럼 하얀 설탕, ‘백설표’는 이후 한국 밥상의 역사가 되었고, 제일제당에서 뿌리와 가지를 뻗은 삼성그룹은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제일제당 스토리
*소사: 삼성그룹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서 시작한 ‘삼성상회’가 그 모태지만, 사업이나 공장 규모로 보면 1953년 부산진구 부전동 537-9번지에 설립한 제일제당이 바탕이 되었다. 제일제당은 1996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 2002년 새로운 이름 CJ주식회사로 변신했고, 2007년 9월 CJ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도입으로 현재 사명인 CJ제일제당으로 거듭났다. 제일제당을 근간으로 하는 CJ그룹은 다소 복잡한 분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 이재현 회장 체제로 자리 잡는다. CJ제일제당은 부산진구 동천변에서 첫 정제 설탕이 생산되던 날인 11월 5일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에피소드: 제일제당도 초창기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설탕 제조에 참여한 한 임원의 증언. “1953년 10월28일 시운전에 들어갔는데 기대했던 설탕은 안 나오고 콩깻묵 같은 것이 나왔다. 기계를 해체했다가 조립하기를 거듭하면서 갖은 궁리 끝에 어렵사리 설탕을 뽑아낼 수 있었다.” 설탕 제조는 당시로선 하이테크 산업이었고, 국민 밥상을 풍요롭게 하는 최고의 식재료였다. 초창기 제일제당에서 근무한 직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당시 우리 월급이 20만 환이었어요. 그때 동천 주변의 10~20평 크기 집값이 15만 환, 김해평야의 논 한 마지기가 2만 환이었죠. 직원들은 물론 업계에서도 우리 회사를 ‘천하의 제일제당’이라 불렀어요.”(‘CJ 50년사’ 인터뷰 발췌)

 

옛 대양고무/흥아타이어

옛 대양고무/흥아타이어 사진

명절 때 어머니가 사 주신 ‘혜성 같은’ 운동화
명절 때면 어머니는 신발가게로 아이를 데리고 가 새 신발을 사 신겼다. “새 신 신고 말 잘 들어. 알았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 기억을 따라 가면 ‘대양고무’와 ‘슈퍼카미트(Super Comet)’란 브랜드를 만난다. 하늘의 혜성처럼 몽둥이를 꺾어놓은 듯한 상표. 신발 한 켤레에 세상이 환해지던 기억이 새롭다. 대양고무는 부산 신발 대기업 중 막내였다. 1976년 부산진구 전포동에 터를 잡았으며 80년대 중반 중저가 제품인 ‘슈퍼카미트’를 내놓으면서 업계의 혜성이 되었다. 슈퍼카미트에는 ‘언제나 자유롭고 싶다!’는 광고 문구가 붙었는데, 그 ‘자유’가 어디쯤 머물러 있는지 궁금하다.

옛 대양고무/흥아타이어 스토리
*소사: 1953년 조용현 회장이 창립한 대양(大洋)고무공업사는 1976년 덕원고무를 인수하면서 본격 신발 생산을 시작했다. 1978년 흥아공업유한회사의 옛 공장을 인수하여 사세를 확장했으나, 1993년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전포동 시대를 마감했다. 대양고무 인근의 전로로에는 ‘흥아타이야’(현 롯데캐슬아파트 자리)와 ‘흥아공업’(현 서면한신아파트 자리)가 함께 있었다. 흥아타이야는 원풍산업(1973년), 국제그룹(1979년)을 거쳐 1986년 우성그룹 계열사가 되었고 ‘우성타이어’로 거듭난다. 1996년 우성타이어가 부도를 맞자 흥아타이야 재생공장을 운영하던 강병중 회장이 물려받아 지금의 ‘넥센타이어’를 만들었다. 전포로에는 이처럼 파란만장한 부산 고무공장 역사가 녹아들어 있다.
*에피소드: 1960~80년대 한국의 신발 대기업은 대부분 부산, 그것도 부산진구에 몰려 있었다. ‘기차표’ ‘말표’ ‘왕자표’ ‘슈퍼카미트’ 등은 잘 나가던 시절 세계를 주름잡던 브랜드였다. 신발 축제도 열렸다. 신발공장에는 ‘여공’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경야독하며 돈을 모아 고향집에 부치거나 살림 밑천을 만들었다. 당시 라디오와 TV광고를 장식한 것도 신발회사였다. 호황일 때 큰 신발업체에는 수천 명~1만 명의 사원들이 일을 했다. 시대변화에 따라 ‘굴뚝산업’으로 불리던 부산진구의 신발업체들은 모두 역사가 되었지만, 그 속의 고무냄새 나는 사연과 애환은 추억으로 머물러 있다(부산진구청 자료)

 

옛 동명목재

옛 동명목재 사진

계를 호령하던 ‘합판 왕국’의 영광과 좌절
동천은 기억할까, 동트는 새벽의 여명과 세계 최대의 합판공장을. 강석진 회장이 맨손으로 일군 동명목재(東明木材)는 성공과 비운을 함께 안은 부산의 최대 기업이었다. 경북 청도의 시골뜨기 소년 강석진은 15살 때(1920년) 빈손으로 부산을 찾아 일본인 가구점에서 목공일을 배우며 사업의 꿈을 키웠다. 1925년 4월 부산 동구 좌천동에 동명제재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동명목재의 출발이다. 사업이 번창하자 그는 부산진구 범일동 862번지(현 범일동 알리안츠생명 부근)에 공장을 짓고 제조 시설을 설치했다. 동명목재는 70년대 수출 1위, 부산 최고 기업으로 ‘동명왕국’을 이뤘지만, 80년초 무리한 사업 확장과 신군부의 압박 등으로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동명목재 스토리
*소사: 동명목재는 1960년대에 한국의 10대 기업에 포함되었고, 임직원만 해도 6천 명이 넘었다. 합판 수출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사세를 확장하던 동명목재는 1963년 부산진구를 떠나 남구 용당동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했다. 1969년에는 2700만 달러의 수출고를 올리며 국내 수출 1위를 기록한 이래, 1975년까지 7년간 연속으로 전국 수출 1위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때가 동명목재의 전성기였다.
‘목재 왕국’ 동명의 몰락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동명목재의 흔적은 동명대를 비롯한 동명문화학원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에피소드: 동명 신화의 중심에는 ‘강석진’이란 불굴의 기업인이 자리한다. 그는 틈만 나면 ‘사업 보국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기업인은 자신의 기업을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로 여기기보다는 기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국가의 공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정신으로 일관해야 한다.”
그의 기업철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또 부단한 기술 연마를 통한 장인정신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는 백련천마(百鍊千磨), 즉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백 번 천 번 부지런히 갈고 닦는다는 뜻의 글귀를 즐겨 썼다.

 

서면의 옛 극장가

서면의 옛 극장가 사진

서면 거리의 옛 영화 누가 기억 하리오
헐리우드·홍콩 키드들은 그저 극장 거리가 좋았다. 총천연색의 극장 간판은 영화 관람 욕구를 자극했고, 영화배우들에 대한 동경을 채근했다. 그 시절 서면 극장가는 화려했다. 중앙로변에 특별히 높은 건물이 없던 시기에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나란히 자리잡은 3층 높이의 동보극장(1957~93), 태화극장(1962~82), 대한극장(1970~99) 등은 주말이면 관람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70년대 극장이 많았을 때는 단관, 소극장 해서 40여 곳에 달했으나 지금은 5곳 정도가 남아 있다. 그 많던 극장과 소극장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무심한 시대 변화다.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그렇지만 기억 속엔 또렷이 살아 있는 그 장면들. 영화의 도시여, 부디 서면 극장거리를 잊지 마시길.

서면 극장가 스토리
*소사: 서면에 극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47년 광복 직후였다. 가장 많을 땐 단관극장 16곳, 소극장 18곳, 멀티플렉스극장 5곳 등 모두 39개나 됐다. 범일동에서 서면으로 들어가다 보면, 범내골 로터리에 동아극장이 있었고, 서면 중앙로에 대한극장, 태화극장, 동보극장이 자리했다. 서면 로터리에는 북성극장이 있었고, 당감동 쪽으로는 천일극장, 동래 쪽으로 노동극장, 그리고 전포동 쪽으로 태평시네마가 있었다.
  서면 극장가는 1960~70년대가 전성기였다. 영화는 남포동 개봉관과 동시개봉을 하면서 입장료는 저렴했다. 1959년 개관한 대한극장은 1900여 석을 갖춘 대형극장으로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많았다.
*에피소드: 서면 극장가는 워낙 유명해서 70년대에 영화 좀 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노(老) 관객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 몇 토막. “의자가 철제여서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팠지. 영화가 재미있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 게리 쿠퍼, 아랑 드롱, 헨리 폰다, 커크 더글러스, 비비안 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멋진 서부의 사나이들과 고혹적인 여배우들이 생각 나.”(60대 관객) “괜찮은 외화는 대부분 북성극장에서 봤다 아이가. ‘자이언트’ ‘무기여 잘있거라’ ‘콰이강의 다리’ ‘황야의 무법자’ 등이 떠오르지. 어지간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가여서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직행했지. 그런데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가 더 보고 싶더란 말야. 단속 임검 선생님들과 숨바꼭질하며 숨어서 보곤 했는데, 그 쾌감은 말할 수가 없었어.”(50대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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