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여왕, 나리꽃 예찬
한여름의 여왕, 나리꽃 예찬
  • 김승윤 기자
  • 승인 2021.07.27 0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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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복더위에 피는 나리꽃

 

 

"일상의 자연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깊은 사고가 엿보이는

박사농부 김승윤의 글은 도시인들을 위한 영혼의 선물"(김귀순)

 

 

작년에 농장 하우스 옆에 옮겨 심었던 참나리 몇 뿌리가 자라 드디어 꽃을 피웠다. 길쭉한 꽃봉오리가 몇 개 생기더니 일주일 전부터 점점 붉어졌다. 삼복더위가 기승인 요즈음은 시원한 이른 아침에 잠깐 나가서 필요한 일들만 하고 그냥 돌아오곤 한다.

 

심심한 여름 농장에 생기를 돌게 만든 나리꽃
심심한 여름 농장에 확 생기를 돌게 만든 나리꽃

 

 

 

뜻밖의 선물, 검은제비나비를 만나다

그런데 이 아침에 사건이 벌어졌다. 나리가 어떤가 보러 갔더니 한 송이가 꽃잎을 완전히 젖히고 피어났고 놀랍게도 커다란 검은 나비 한마리가 꽃을 희롱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보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 나비는 검색해보니 호랑나비과에 속하는 ‘검은제비나비’가 틀림없다.

 

 

한여름 '너와 나'로 뜨겁게 만난 검은제비나비와 참나리

 

 

검은제비나비는 “앞으로 저 나비를 검은 히잡의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말자”라는 특이한 시(송찬호)에도 있었고 조선시대 문인 화가 남계우의 ‘화접도’에도 뚜렷이 그려져 있다. 이맘때면 야산과 정원에 흔하디 흔하게 피는 참나리이지만, 우아한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제비나비의 느릿한 펄럭임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니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했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대로 ‘나-그것’의 관계를 넘어 ‘나-너’의 관계로 나아간 것일까.

 

화접도
남계우의 '화접도' 속의 검은나비들의 향연

 

 

 

성서에도 인용된 꽃중의 여왕, 나리꽃 

나리꽃에 대한 사색은 조금 더 이어졌다. 나리와 백합(百合)은 사실 식물학적으로 같은 것인데도 백합은 희고 순결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나리는 들에 피는 하찮은 꽃처럼 여겨진다. “들에 핀 백합화(lilies of the field)”는 예수의 산상수훈(마태 6장 28-29)에 나와 유명하다. 그런데 원문 번역에 약간의 오류가 있어서인지 나중에 공동 번역성서에는 그냥 “들꽃”으로 그리고 천주교 새 번역 성경에는 “들에 핀 나리꽃”으로 옮겨졌다. 이 들꽃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흔하게 피는 아네모네라서 그 화려함이 솔로몬의 영화로운 옷을 능가한다는 예수의 표현에 걸맞다는 설도 있다(‘성서의 식물’, 최영전).

 

그 화려함이 명왕 솔로몬의 옷을 능가한다는 나리꽃
그 화려함이 명왕 솔로몬의 옷을 능가한다는 나리꽃

 

 

우리의 고정관념이 되어 있는 순백의 백합은 마돈나 릴리(Madonna lily, 성모백합)라고 하는데, 지중해 연안 등 유럽에 흔하다고 한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북부지역에서 조금 발견될 뿐이고 예수가 활동하였던 갈릴리 호반이나 나사렛에서는 자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모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한 이미지와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고 르네상스 화가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흰백합화를 바치는 종교화를 그렸다. 희고 순결한 백합화는 이렇게 신성화 되었다.

 

 

검은구슬 '주아'로 번식하는 나리

또 백합(百合)이라는 이름은 그 알뿌리가 100(百) 개(많은 수)의 비늘줄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붙여진 것인데, 희다는 의미의 백(白)으로 오해되어 혼란이 가중된다. 순백의 백합은 나리의 일종일 뿐이다. 우리 토종 나리는 참나리 외에도 하늘나리, 땅나리, 말나리, 솔나리 등 수십 종이 있고 순백색의 흰솔나리도 있다고 한다. 희고 순결한 백합의 이미지를 깨자는 것이 아니라, ‘나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제 뜻을 회복해야 할 듯하다. 영어의 ‘릴리(lily)’는 우리말 ‘나리’와 의미도 같지만 발음도 비슷하다. 나리의 줄기에 붙어 있는 검은 구슬 같은 주아(珠芽, bulbil)는 자기를 완전하게 복제하는 씨앗 아닌 씨앗이다. 이 주아만 따다가 뿌려놓으면 나리를 쉽게 번식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참나리 꼭대기에 온갖 식물들에 피해를 주는 반갑지 않은 순백색의 선녀벌레가 침범해 있다. 과감하게 잡아 없애지 않을 수 없었다. 백색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선녀도 먹어야 산다'(?) 생존앞에 처련한 선녀벌레
'선녀도 먹어야 산다'(?), 생존앞에 처련한 선녀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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